[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97문. 중생한 사람들에게 도덕법은 어떤 점에서 특별히 유용합니까?
공포의 쇠사슬에서 사랑의 나침반으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율법이 필요한 진짜 이유 (대요리문답 제97문)
우리는 앞선 제96문에서 거듭나지 못한 비중생자들에게 도덕법이 양심을 깨우는 영적 경보장치이자, 죄를 핑계치 못하게 만드는 냉혹한 검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중생한 사람(성도)’들에게 도덕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다 없애주셨으니, 이제 신자는 율법을 거들떠보지도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구원받은 사람에게 계명을 강조하는 것은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제97문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우주에서 가장 복음적이고도 아름다운 해답을 제시합니다. 성도에게 율법은 나를 죗값으로 옭아매는 공포의 쇠사슬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감사의 나침반’입니다.
1. 질문: 중생한 사람들에게 도덕법은 어떤 점에서 특별히 유용합니까?
답변: 중생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도덕법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므로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거나 정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유용한 점 외에 중생한 사람들에게 도덕법이 특별히 유용한 점은, 이 법을 친히 완성하시고 중생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또 그들을 위해 그 법의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와 그들이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더욱 감사하게 하고, 이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의 순종을 위해 주신 도덕법을 그들이 더욱 주의하여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롬 6:14, 7:4, 6, 갈 4:4∼5, 롬 3:20, 갈 5:23, 롬 8:1, 7:24∼25, 갈 3:13∼14, 롬 8:3∼4, 눅 1:68∼69, 74∼75, 골 1:12∼14, 롬 7:22, 12:2, 딛 2:11∼14)
2. 대선언: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대요리문답은 중생한 성도의 신분적 변화를 강력하게 선포하며 시작합니다. 성도는 율법이라는 계약서에서 완벽하게 해방된 존재입니다.
[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합병 구조 ]
-첫째 아담의 실패 → 행위 언약(순종하면 영생, 불순종하면 사망)의 파기 및 인류의 파산
-둘째 아담 예수님 → 100% 완전한 순종(능동) + 십자가의 저주 받으심(수동)으로 법을 성취함
-최종 합병 (은혜) → 행위 언약의 완벽한 결과물이 '은혜 언약' 안으로 합병되어 성도에게 무상 전가됨
- 정죄와 칭의의 도구로서의 퇴장 (롬 8:1):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고(이신칭의), 율법을 어겼다고 해서 지옥 형벌의 정죄를 받지도 않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신분 (롬 6:14):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도덕법의 모든 요구를 지키셨고(능동적 순종), 우리가 받아야 할 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기(수동적 순종)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것은 냉혹한 법 조문이 아니라 따뜻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3. 거울의 반전: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을 확인하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에게 왜 도덕법이 유용할까요? 첫 번째 특별한 유익은 율법이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결 고리(연합)’를 눈으로 보게 해주는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4-25)
성도가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다 보면,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찌꺼기와 연약함 때문에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실패의 자리에서 성도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 이토록 무능한 나를 위해 주님이 대신 저주를 받으셨구나! 내가 진짜 주님과 떼려야 뗄 수 없이 묶여 있는 구원받은 자가 맞구나!"를 절감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더 깊이 의지하게 만듭니다.
4. 순종의 동기 변화: 영원한 형벌이 아닌 '영원한 감사'로
도덕법이 성도에게 주는 두 번째 특별한 유익은 순종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는 점입니다.
실패할수록 깊어지는 감사 (골 1:12-14): 비중생자는 법을 어기면 공포에 떨지만,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율법의 높은 기준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볼 때마다 나를 대신해 법을 완성하신 예수님께 더 큰 감사를 드립니다.
본성적인 거룩의 추구 (롬 12:2): 거듭난 성도는 영혼의 본성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계명을 어기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담긴 도덕법에 순종하기를 스스로 힘씁니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딛 2:14): 불신자의 순종은 지옥에 가지 않으려는 ‘노예의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반면 성도의 순종은 나를 구원하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다는 ‘자녀의 감사와 사랑’에서 우러나옵니다.
[교훈과 적용] "장래의 은혜를 신뢰하며 계명을 사랑하십시오"
대요리문답 제97문은 예수 믿는 우리가 도덕법을 대하는 가장 건강한 신앙적 태도를 확립해 줍니다.
무율법주의의 방종을 찢어버리십시오: "이제 구원받았으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은 복음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모독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는 다리는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가 걸어가야 할 거룩한 삶의 궤도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계명을 기쁨으로 묵상하고 따르십시오.
실패의 자리에서 낙심 대신 찬송을 부르십시오: 일상에서 말씀대로 살지 못해 무너질 때가 있습니까? 사탄은 "네가 그러고도 성도냐"라며 정죄의 화살을 쏠 것입니다. 그때 율법의 정죄를 차단하시고 온전한 의를 입혀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존 파이퍼 목사의 말처럼, 과거의 은혜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매 순간 나를 붙드시는 ‘장래의 은혜’를 신뢰함으로 다시 일어나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십시오.
감사의 크기가 순종의 크기입니다: 혹시 신앙생활이 지치고 의무감만 남으셨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려 다시 ‘행위의 법’ 아래로 기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옥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해 율법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내신 주님의 사랑을 다시 묵상하십시오. 은혜에 감격할 때, 주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축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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